배우 고준 “마음은 얼굴에도 반영돼요”

배우 고준은 갑자기 등장한 배우가 아니다. 그는 더디지만 뜨겁게 세상 밖으로 나오는 중이다.

시스루 셔츠, 김서룡 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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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수트, 디올 옴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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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팅된 베스트, 뮌. 팬츠, 디올 옴므. 슈즈, 살바토레 페라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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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미스티> 출연 이후 많은 게 바뀌었죠? 많이 알아보나요? 어머니는 정말 좋아하시는데, 전 잘 모르겠어요. 영화만 하던 때보다 여성 팬 분들이 생기긴 한 것 같은데 체감은 잘 못하겠어요.

배우 고준이 출연한 영화를 다 봤지만, 사실 같은 사람인지 몰랐어요. 작품마다 얼굴이 변하는 느낌이에요. 한 인물의 마음에 머물러 있으면 정말 변해요. 실연당했을 때와 사랑하는 상태일 때 표정이 다르잖아요? 전 이걸 잘 활용해요. 배역을 준비할 땐 그 사람이 된 것처럼 살죠. <청년경찰>의 조선족 영춘을 맡았을 땐 일상에서도 연변 사투리를 쓰고 냉대를 받았어요. 마음을 알면 얼굴에도 반영돼요.

하지만 그렇게 되면 배우 고준을 알리긴 쉽지 않은데, 아쉽진 않아요? 저는 절 알리기보다 그 인물의 마음을 잘 표현하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미스티>로 가시화된 것에 대해 쾌감을 느끼진 않아요. 오히려 저를 못 알아보고 극중 인물로서 인식하실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되게 오타쿠 같죠.

변신의 폭이 넓은 건 장점이죠. <미스티>에선 세계를 제패한 골프선수였는데, 이번에 개봉하는 <변산>에선 지방에서 활약하는 귀여운 건달이네요. 사실 <변산>을 먼저 찍었어요. <변산> 끝자락에 <미스티>가 맞물려 왔다갔다 하며 촬영했는데, 껄렁껄렁한 자세로 전라도 사투리를 걸쭉하게 쓰다가 꼿꼿하게 서서 신사적으로 “안녕하세요, 케빈 리입니다” 하려니 리듬감이 너무 달라서 고생했어요. 걸음걸이, 말투, 제스처, 모든 게 다르니까. 힙합 하다가 클래식을 하려고 턱시도를 입을 때의 ‘뻘쭘함’이랄까. 사실 <변산>의 용대는 몸에 배어 있는데, 케빈 리 같은 인물엔 무지한 상태라 어색했죠. 전 잘 살고 성공한 사람에 대한 감정 지식이 없거든요.

하지만 “봤니? 이게 나야.” <미스티>에서 케빈 리가 말했을 때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어요. 어쩌면 그건 18년간 무명 세월을 보내온 배우 고준이 세상에 하고 싶었던 말 아니었나요? ‘다들 안 된다고 하지만, 결국 난 해낼 거야’라고 생각하며 버텨왔죠.

케빈 리는 무능력할 때 연인에게 버림받고 절치부심해 세계적 선수가 되고, 집요한 인정투쟁을 거듭해요. 닮지 않았다고 했지만 닮은 점도 있었죠? 고준도 뭔가를 그렇게 깊이 열망해본 적이 있나요? 과거에 케빈 리와 비슷한 경험을 한 적 있어요. 능력이 없어서 여자에게 버림받았죠. 연기를 하고 싶은데 나이는 들어가고, 결혼을 해야 할 시기가 됐을 땐 미래를 함께할 비전이 없었어요. 그렇게 보내주고 가슴앓이를 오래 했어요. 전 마음이 늦게 열리고 늦게 닫히는 사람이라, 누굴 만나는 데 오래 걸리고 헤어지고 나서도 실연을 오래 겪어요. 하지만 케빈과 제가 다른 건, 전 사랑보다 연기를 열망했다는 거예요. 너무 강하게 원했고, 지금까지도 그래요. 18년째 연기를 하고 있지만 아직도 배우가 되고 싶어요.

배우이면서 배우가 되고 싶다는 건 어떤 의미예요? 인물에 대해 깊게 이해하고, 진실하게 연기하는 진짜 배우가 되고 싶다. 연예인이 되고 싶었던 어릴 땐 모방하는 방식으로 연기를 했어요. 그러다 독립영화에서 장애인을 연기하게 돼 몸이 불편하신 분을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이분의 아픔을 그저 흉내 내려 했던 내 자신이 부끄러워지더라고요. 많은 생각을 했어요. 연기는 타인의 삶을 빌려 쓰는 것이고, 절대 허투루 흉내 내면 안 되겠다. 마음을 대변할 수 있을 정도로 해야지. 연기관이 바뀐 계기였죠.

고준에게 인물을, 사람을 깊이 이해한다는 건 어떤 건가요? 저는 누군갈 이해할 때 그 사람의 상처와 트라우마에서 시작해요. 아픔의 궤적을 추적하죠. 언젠가 <나의 왼발>의 뇌성마비 장애인 크리스티, <오아시스>의 공주 같은 인물을 연기해보고 싶어요. 약자에게 관심이 많거든요.

누군가의 고통에 깊이 골몰하네요. 아픔이 있는 인물에 본인 스스로 공명하는 지점이 있나요? 음…. 저 역시 과거에 힘든 일을 많이 겪었거든요.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폐쇄적인 성격의 아이였고, 촬영할 때 보셨겠지만 화상 흉터가 있어요. 트라우마가 심했죠. 유치원을 못 다니게 돼서 집에만 있어야 했던 때가 기억나네요. 부모님이 외출하실 땐 제가 나가지 못하게 집 밖에 걸쇠를 걸어놓고, 전축으로 클래식 전집을 틀어두셨어요. 그러면 저는 혼자 집에서 내내 클래식을 듣고, 토요 명화를 봤죠.

그 시절 마음에 들어온 영화가 있었어요? <양철북>을 그때 봤는데, 세상을 향해 북을 치고 소리를 치는 오스카의 모습이 저와 닮은 거예요. 저도 보통 아이와는 다르게 행동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도와달라는 말이었던 것 같아요. 혼자 있고 싶다는 건 사실 착각이에요. 함께 있고 싶은 건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말죠. 그렇게 영화를 보면서 혼자가 아니라고 느끼고, 용기를 얻었어요.

사실 지금의 밝고 호쾌한 모습을 보면 좀처럼 그 시절을 연상하기가 힘듭니다. 어떻게 그 시기를 통과해왔어요? 처음엔 사회적 성향을 기르기 위해 성당에 다니면서 복사를 했는데, 신부님이 너무 멋져 보였어요.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고 모두가 신부님의 말씀을 경청하는데, 마치 배우가 독백을 하는 것처럼 보였죠. 한동안은 신부가 되려고 했어요. 하지만 이성에 눈을 뜨면서 신부의 길은 포기하고, 배우를 준비하기 시작했죠.

연기를 시작하면서 트라우마를 조금은 탈피할 수 있었나요? 연기를 하려면 내가 아닌 다양한 성격을 연기해야 해요. 웃기지 않아도 물리적으로 웃어야 하죠. 그러면서 성격을 조금씩 배웠어요. 사람에게 희로애락이라는 게 있구나. 나에게 ‘애’와 ‘로’만 있는 게 아니라 ‘희’와 ‘락’도 있구나.

그 원동력으로 18년 간 연기를 해왔군요. 물론 그 세월이 쉽지는 않았지만요. 일이 안 풀리니 생활고를 겪고 미래가 불확실하고, 사랑에도 자꾸 실패하고. 밝은 역할은 이입이 안 된다고 느꼈던 것 같아요. 그런데 요즘은 주변에서 계속 “잘되니 좋지?”라고 말해주고, 저도 그간의 어두운 역이 아닌 밝은 역할도 맡으면서 이제야 조금씩 겨우겨우 인정하고 있어요. 내가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어두운 색으로 나를 고수했구나. 이제 나도 밝아질 수 있겠구나.

<타짜>의 유령, <청년경찰>의 영춘 같은 살벌한 악역을 주로 맡아왔지만, <변산>의 용대는 코믹한 건달이죠. 정서적으로 환기가 됐을 것 같은데요? 내 안에도 이런 밝음이 있는데 그간 한쪽에 숨겨놨었구나, 깨달았어요. 행복했고, 치유가 됐어요. 작품을 하면서 처음으로 괴롭지 않았어요. 이준익 감독님이 버림받은 유기견 같은 저를 따듯하게 보듬어주셨고, 정민이나 고은이와 진짜 초등학교 동창들처럼 지내면서 표현이나 성격도 많이 교정됐어요. 아직도 들리는 소문에는 제가 무섭고 거칠다고 오해하는 분들이 계신 것 같아요. 저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그런 얘기를 들으면 되게 마음이 아파요. 지금도 <변산> 배우들과 친하게 지내는데, 그 친구들은 항상 “웃어, 웃어. 사람들이 오해해”하면서 저를 ‘갈궈’줘요. “형, 그런 식으로 얘기하면 사람들이 무서워해요” 같은 식으로. 하하하.

초등학교 동창들끼리 뭉쳐 투닥이면서도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이야기를 연기하면서, 그 시절을 조금은 편안하게 생각하게 됐을 수도 있겠네요. 연기하면서 과거의 몇 안 되는 좋았던 순간들이 불현듯 무의식적으로 떠오르더라고요. 전에는 의식해서 기억하려 해도 떠오르지 않았는데, 나에게도 즐겁고, 까불거리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있었구나. 그 시간들을 복원해준 고마운 작품이에요. 어마어마하게 기억에 오래 남는 작품이 될 것 같아요.

인지도를 높여준 <미스티>, 따듯한 경험이었던 <변산>이 있는 올해는 배우 고준의 삶에 변환점이 됐나요? 생각해보면, 마치 신이 디자인해주신 것 같아요. 삶의 전반부에 힘들었던 걸 잘 견뎠으니, 그걸 활용할 수 있는 후반전을 준비해줄게. 삼십대가 통째로 어둡고 우울했는데, 다시 설레고 싶어졌어요. 이런 날이 올 줄 꿈에도 몰랐는데, 작품의 스케줄이 겹쳐서 선택을 고민해야 하는 일도 생겼고요.

지금 촬영 중인 김금희 소설 원작의 단막극 <한낮의 연애>에선 아주 이상한 연애를 합니다. 아무것도 없는, 공회전하는 듯한, 공허한 여자 양희와 계속해서 어긋나는 만남. 양희를 이해할 수 있어요? 이해할 수 있어요. 저도 어렸을 때 이상하게 표현했잖아요. 단지 자기 마음을 피력하는 언어가 다른 거라고 생각해요. 양희 역을 맡은 최강희 선배는 정말 양희 그 자체예요. 연기하는 선배의 눈을 들여다보면 양희를 알 것 같죠.

반면 배우 고준이 연기하는 필용은 정상성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인물이 아니죠. 맞아요. 하지만 자기가 자기를 못 만나는 인물이죠.

정상 사회의 범주 안에 자신을 밀어 넣으면서, 자신을 자신으로부터 소외시키는 인물이란 얘기죠? 맞아요. 양희를 찾는 것도 자신을 찾고 싶어서였을 거예요. 한창 밝아졌다가, 이 역을 맡으면서 체중도 확 감량하고 다시 우울해지고 있네요.

고준은 필용과 달리 자기 자신을 만나면서 살고 있나요? 어쩐지 오늘 좀 만났다는 생각이 드는데, 하하. 이 작품 끝나면 자주 만나려고요. 김준호를. 제 본명이거든요. 김준호를 만나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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