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서체 VS. 제주서체

대한민국 지방자치단체에서도 너 나 할 것 없이 지역 고유의 글자체를 만들고 있다. 지역과 관계를 맺는 글자체는 뭐가 다를까? 달라야 할까?

대한민국 지방자치단체 글자체 토너먼트를 시작한다. 도시의 정체성을 글자체 디자인으로 구축하려는 전 세계적 추세에 발맞춰, 한국의 많은 지방자치단체에서도 지역 글자체를 제작하고 있다. 이번 토너먼트의 대상은 한국의 모든 지자체 글자체다. 그리고 토너먼트의 주관과 심사는 필자다. 물론 가상 토너먼트이니 너무 심각할 것은 없다.

출전한 글자체 중에는 과연 전문가의 손을 거친 게 맞나 싶을 만큼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도 있고, 마지막까지 선전한 선수도 있다. 하지만 줄 세워 평가하는 것이 권할 일도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일도 아니므로, 3위 밖 선수들의 명단은 굳이 언급하지 않는다. 모든 항목에서 고른 기량을 발휘한 바, 제주서체와 서울서체가 결승에 올랐다. 누가 우승자일까?

우선 글자체와 글자 가족의 구성이 각각 다르다는 점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서울서체는 크게 명조체 계열인 서울한강체와 고딕체 계열인 서울남산체로 나뉜다. 글자 가족은 여기에서 더 분화되지만, 이 글에서는 이 정도의 논의로 충분하다. 사람의 눈은 글자를 ‘보는’ 동시에 ‘읽는다’. 눈에 독특하게 두드러져 보이는 글자체와 읽는 기능을 잘 수행하는 글자체는 영역이 다르다. 전자는 그래픽적 성격, 후자는 타이포그래피적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 서울서체는 서울한강체와 서울남산체로 이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잡고자 했다. 기능적으로 잘 읽히는 동시에, 여타 글자체와 분명히 구분되는 그래픽적 특성을 모두 보여주고자 했다.

반면 제주서체의 구성을 보면, 이 두 영역을 뚜렷하게 구분해 목적성을 강화했다. 그래픽적 성격을 가지고 제목용으로 쓰이는 제주한라산체는 서울한강체 및 서울남산체보다 개성이 훨씬 두드러진다. 한편, 타이포그래피적 성격을 가지고 본문용으로 쓰이는 제주명조체와 제주고딕체는 전문가가 아니라면 여타 명조체, 고딕체와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명료한 기능성을 추구한다.

각각의 역할에 무리가 없도록 영역을 분리시켰다는 점에서 제주서체의 구성에 좋은 평가를 내릴 수 있겠으나, 제주한라산체ㆍ제주명조체ㆍ제주고딕체가 함께 조화롭게 쓰이지 않고 따로 쓰인다면 같은 제주서체에 속한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어렵다는 점은 아쉽다. 서울한강체ㆍ서울남산체는 따로 쓰여도 서로 가족 관계를 이루는 연결성이 훨씬 강하다.

이번에는 글자체의 디자인이 얼마나 잘되었는지 살펴본다. 제주한라산체는 화산섬인 제주도의 특징을 잘 드러낸다. 구멍이 뽕뽕 뚫린 현무암 말고도, 감귤 등 몇몇 모티브들이 제주의 인상을 대표하는 후보에 오른 바 있다. 사무실에서만 보기엔 후보안인 감귤체도 매끈하게 잘 만들었지만, 제주도에 직접 갔을 때 받은 압도적인 인상은 역시나 검고 거칠거칠한 현무암의 지형이었다.

제주명조체와 제주고딕체는 잘 만든 여타 명조체나 고딕체에 비해서도 디자인적 품질이 결코 낮지 않다. 자소가 또렷하고 현대적이며 밝은 특성을 보여준다. 살짝 탈네모적인 모듈을 가지고 있어, 종이 위 텍스트에서의 가독성뿐 아니라 공공장소의 사인에서 판독성을 높이려는 의도도 보인다. 제목용 한라산체와 본문용 명조고딕체의 영역을 뚜렷이 구분함으로써, 각각 무리 없이 디자인되었다.
서울서체는 제주서체에 비해서도 조금 더 탈네모적 형태를 띠고, 사인에서 높은 판독성을 드러내며 젊고 현대적이면서도 산뜻한 인상을 준다. 개발안을 살펴보면 선비정신, 여유 등을 추구하고, 한옥 처마의 선을 모티브로 했다는 점에서 서울이 ‘전통의 도시’라는 측면을 내세우려 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해서 서울서체에서 선비 정신과 한옥 처마의 선을 느끼는 시민은 별로 없을 것이다. 제주한라산체를 보며 현무암의 지형을 연상할 수는 있지만, 서울한강체를 보고 한강을, 서울남산체를 보고 남산을 연결 짓기도 어렵다. 그래도 서울서체는 널리 사용되면서, 추상적인 글자 형태만으로 서울시의 글자체라는 인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다.

다만 글자체 하나에 개성과 기능성을 모두 담으려다 보니 과부하가 걸린 서울서체의 낱글자들은 눈에 띈다. 시옷은 참 예쁜데 히읗은 과도하다. 지하철 2호선과 6호선 합정역의 사인에서 서울남산체 히읗을 볼 수 있다. ‘합’자처럼 획이 많은 글자에서 획이 유독 몰린 형태가 더욱 두드러지고, 그 와중에 동그라미의 오른쪽 윗부분을 열어 글자의 개성을 무리하게 추구하면서 글자의 골격은 부득이하게 찌그러졌다.

다만 서울서체는 업그레이드 중이다. 처음부터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치밀하게 설계해 높은 완성도를 보여줬다면 좋았겠지만, 이미 발표된 상태에서 지속적인 개선을 해나가는 것도 바람직해 보인다. 도시의 환경이 계속 변모해가는 만큼, 글자체도 도시 환경에 유기적으로 반응하도록, 도시와 글자가 함께 성장하도록 한다는 것이 서울서체의 향후 운용 방침이라니 더욱 기대를 건다.
특정 지역의 전용 글자체를 개발하는 것은 도시를 홍보하기 위한 브랜드 아이덴티티 구축이 목적이다. 대부분의 도시와 지역 전용 글자체는 해당 행정구역에서 사업을 정책적으로 주도해 만든다. 물론 다른 경로로 글자체가 지역과 관계를 맺는 국내외 사례들도 있지만. 글자체로 도시 브랜드를 구축하려는 움직임은 유럽 여러 도시를 시작으로 확산돼왔다. 글자체를 통해 지역의 개성과 매력을 드러내고, 이렇게 확립된 지역 정체성은 시민들의 결속력을 높인다. 글자를 통해 도시의 취향, 시민들의 특성, 도시의 자연이나 건축 환경 등을 드러내는데 성공하면, 시민들뿐 아니라 다른 도시나 국가에서 찾아온 방문객들에게도 도시의 인상을 일관되게 보여줄 수 있다.

글자체가 지역의 브랜딩 역할을 잘하고 있는지 판단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지는 게 좋다. 선택한 글자체의 양식은 어떤 장점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지역을 표상하고 지역과 공존하기에 적절한가? 복잡다단한 삶의 양태가 얽혀서 고동치는 지역을 틀에 박힌 하나의 형용사, 혹은 하나의 글자로 규정짓는 것은 타당한가? 도시 본연의 얼굴을 인위적인 이미지로 치장해 오히려 부자연스러움을 야기할 가능성은 없나? 수용자인 시민들의 정서와 편의는 배려되고 있나? 시민들이 글자체를 통해 그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가질 만큼, 그 글자체가 심미적ㆍ조형적으로 만족스러운가? 이 항목에 대한 판단은 전문가가 아니라도 할 수 있다. 지역민들이 느끼는 그대로가 답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공들여 잘 만든 글자체가 실제로 널리, 편리하게 쓰이고 있는지를 점검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디자인을 잘했더라도 무용지물이다. 일반 지역민들이 그 지역 글자체의 고유한 특징과 차별성을 분석적으로 식별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지역 전용 글자체는 일상의 일부로서 부지불식간에 지역민의 생활에 깊숙히 개입해 신체와 인지에 영향을 미친다.

스스로가 서울 시민이기도 하지만, 서울서체는 공공의 사인 시스템부터 서울시의 공문서에 이르기까지 서울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몇 번 방문한 것이 전부이긴 하나, 제주도에서는 제주서체를 거의 보지 못했다. 제주서체는 제주도 전체를 위한 글자체다. 그러나 제주시에서도, 서귀포시에서도, 제주한라산체는 보이지 않았다. 버스 노선도에는 제주고딕체가 기능적으로 예쁘게 쓰였다. 하지만 전문가가 아니라면 그 고딕체가 제주고딕체인지 식별하기 어려울 듯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주공항에서 서귀포로 가는 버스길 내내 서울서체로 큼지막하게 쓴 광고 현수막이 펄럭였다. 심지어 부산극장 간판에 서울서체가 쓰인 모습도 본 적이 있다. 활용도 면에서는 대한민국 수도의 글자체답게, 지역을 넘어 전국적인 위용을 드러내는 서울서체였다.

결승에 선 제주서체와 서울서체. 지역민이기도 한 당신이라면 어느 쪽에 우승을 판정하겠나? 사람마다 가치 판단이 다르고, 지금까지 언급한 항목들에 대한 가중치가 다를 테니, 그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테다. 우승 글자체를 가리는 최종 판단은 당신에게 맡긴다. 공공 영역의 글자체는 1차적으로 지역민의 공공 생활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하기 위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지역민의 자존감을 높여주기 위해 존재하니까. 글 / 유지원(홍익대학교 시각디자인과 겸임 교수)